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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이 포항으로 놀러온다고 했다. 대구에 있는 나를 보러 올 겸, 여행지를 포항으로 잡은 것이다. 멀리 경기도 북부와 강원도에 사는 가족들이 꽤 먼 길인데 나를 보러 온다고 멀리 오는 게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만나기만 하면 항상 작고 큰 갈등이 생기고, 결국 속상하게 헤어지는 그간의 가족 모임이 또 만들어진다는 게 불편했다. 날보러 온다고하니 내가 좀 더 준비해야 할 것 같아서 꽤 신경이 쓰이기도 하고, 이번에도 가족들 누군가가 마음이 상하는 일이 생길까봐 불안했다.
그래도 언니가 예약한 풀빌라는 최고였다. 남편도 숙소로 가는 길에, 풀빌라라고 해봤자 그냥 펜션에 작은 수영장이 딸린거겠지 하며, 큰 기대를 안 한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 둘은 들어서자마자 40평대 아파트보다 넓은 거실과 한 쪽 벽면이 모두 통유리여서 그 뒤로 보이는 잔잔한 짙은 남색과 에메랄드빛이 섞인 해안선에 압도되었다. 우리는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가족들은 이미 미온수의 따뜻한 풀장안에서 놀고 있었고, 우리도 뒤늦게 합류를 했다. 인피니티 풀장을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그 안에서 튜브를 타고 둥둥떠서 사진을 찍었다.
저녁으로는 포항근처 영덕에서 산 대게와 킹크랩, 서비스로 받은 홍게와 백함찜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푸짐하게 먹었다. 내일 라면에 넣을 게딱지도 냄비에 넣어두었다. 저녁 상을 가족들이 차렸기에, 우리가 부부가 상을 치우려고 했다. 언니가 내일 먹을 라면을 빨리 사오는 게 낫겠다면서, 우리부부를 편의점으로 보냈다. 신혼인 우리 둘이 시간을 바닷가에서 보내라고 가족들이 배려하는 구나 싶어서 고마웠다. 가을 바닷바람에 춥지 않게 외투를 단단히 껴입고 해안가를 따라 편의점으로 천천히 출발했다. 남편과 저녁밤 바다의 소리를 들으면서 고운 모래를 따라 재잘거렸다. 항상 같이 있어도 남편과 하는 담소는 좋았다. 라면 한 묶음과 음료수, 아이스크림 등등을 후식으로 사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풀빌라 건물은 3개 동으로 나뉜 몇개의 건물이었고 안전 때문에 중앙 현관을 밤에는 닫는 것 같았다. 카드키를 들고 가지 않은 우리는 형부가 공동 현관을 열어줄 때까지 가을 밤하늘에 떠있는 별을 보면서 기다렸다. 5분 정도가 지났을까, 허둥지둥 내려온 형부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숙소로 올라갔다. 꼭대기층에 자리한 숙소 문을 여는 순간, 통유리에 아기자기하게 풍선들이 메달려 있었다.
”HELLO BABY! "
아기자기한 풍선들이 천장과 벽면에 달려 있었다. '엇? 이건 뭐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잠시 멈칫했다.
곧이어 "임신을 축하한다"는 가족들의 인사가 이어졌다. 베이비 샤워를 해주면서 임신을 축하해주고 싶었단다. 풍선이 달린 통유리 저 멀리 어두운 밤바다와 황금색 모래알이 이어진 해변이 보이고, 노란색 조명이 반짝이는 풍선을 비췄다. 이걸 해주기 위해서 가족들이 먼 곳에서 나를 보기위해 포항으로 모였구나. 풍선을 잔뜩 부느라고 우리를 편의점에 보내고, 카드키를 우리 손에 안 쥐어주고 형부가 직접 허둥지둥하면서 내려와서 우리 현관문을 열어줬구나. 우리를 편의점에 보낼때부터 약간 어색했던 행동들이 이해가 갔다. 따스한 조명 아래 선 순간 내 마음에 있는 딱딱하게 굳었던 작은 응어리가 스르르 녹아내리는 걸 느꼈다. 상처가 치유되는 느낌이 이런 거구나,라고 이런 느낌이구나. 가족으로부터 온 사무친 아픈 기억들을 조금은 바다에 떠내려보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가족은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주된 원인은 아닐지라도, 불행 요인 중 하나는 나의 중증아토피가 빠질 순 없었다. 나와 많이 갈등으로 얽혀있는 사람은 우리 언니다. 언니가 두돌이 되기 전에, 허약하고 아토피로 항상 얼굴이 빨간 밤새 가려워서 우는 동생인 내가 생겼다. 엄마의 관심은 어리고 아픈 내가 우선순위였다. 기질이 질투와 불안이 심한 언니는 엄마의 관심을 독차지한 내가 미워죽겠는 존재였을 것이다. 엄마가 고작 한살 많은 아가인 언니에게 의젓하게 행동하기를 기대하는 것도 항상 불만이었으리라. 언니는 어리고 작은 나에게 자신의 분을 성장기 내내 표현했고, 연년생인 나는 그 기세에 질세라 언니와 맞붙어 싸워댔다. 엄마는 쉽게 아토피가 낫지 않는 나를 죄책감으로 평생 돌봤고, 가정에 전혀 무관심한 아빠는 항상 이런 갈등이나 어려움에 섞이고 싶지도 않아했고, 이런 상황을 알면서도 가정으로부터 심리적으로 멀리 도망갔다. 여러가지 다른 원인들도 가족들 갈등에 기름칠을 했고, 최초 내 기억이 있었을 때부터 크고 작은 것들로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며, 그 상처들은 각자의 마음에 화석처럼 굳어버린 채 살아왔다.
그래도 그날 저녁만큼은 정말 행복했다. 따스한 조명이 비추는 거실과 베이비샤워 풍선 앞에서 모여서 하하호호 웃으며 같이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우리는 루프탑에 올라 별들을 바라보면서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눴다. 아이스크림을 까먹으면서 작은 조명을 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밤을 보냈다.
다음 날 화창한 가을 새벽, 다른 가족들은 자고 있었다. 엄마와 나는 거실의 아늑한 쇼파에 기대앉아 통유리 창을 통해서 잔잔한 포항 바다 위로 해가 떠오르는 광경을 느긋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엄마와 나 둘만의 고요한 시간이었다. 마침 둘뿐이어서 나는 포항에 오기 전에 써놓은 편지를 내 가방에서 조용히 꺼내서 엄마게에 건넸다.
편지를 쓴 날은, 남편과 함께 임산부의 날을 맞아 열리는 임산부 콘서트에 다녀온 날이었다. 그날 콘서트에는 피아니스트, 첼리스트 등의 협주와 가요, 가수 자두 등이 등장해서 무대가 무척 즐거웠었는데, 별안간 나는 엄마가 생각이 나서 눈물이 꽤 났었다. 내가 항상 뱃속의 태아를 위해 기도하면서, 이 아이가 건강하고 행복하길 바라는 것처럼, 우리 엄마도 내가 그렇게 태어나길 간절히 바랐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태어난 아이가 평생 아토피로 시달리는 걸 보면서 엄마가 얼마나 속상했을까, 엄마의 마음에 감정이입이 되어서 눈물이 났다. 그리고 아토피로 인해서 내 삶이 너무 고달펐던 어린 날들이었지만, 나를 끝까지 곁에서 돌봐준 엄마가 고마웠다. 콘서트가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 엄마에게 편지를 썼다. 생을 포기하고 싶었던 나를 엄마가 항상 곁에서 지켜주어서 내가 이렇게 행복한 날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고, 감사하다고 적었다. 영영 오지 않을 것 같던 행복한 날이 내게 온 것에 놀랍다고, 그런 날이 오기까지 나를 포기하지 않아줘서 고맙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떠오르는 붉고 노르스름한 태양 빛이 엄마의 얼굴을 비췄다. 엄마는 내 편지를 읽고 환하게 웃으면서 화답했다. "네가 아토피로 너무 힘들었을 때, 너에게 언젠가 이런 행복한 날이 오길 간절히 기다렸어. 네가 행복해서 나는 정말 기뻐."
인생을 살아가면서 배우는 게 된 놀라운 사실은, 고단한 삶을 인내하는 어느 날, 결국은 행복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전혀 내게는 허락되지 않을 것만 같았던 날들이 내게 다가와 있다. 아토피가 많이 나아지고, 사랑하는 남편과 결혼하고, 건강한 아기를 임신하고가족들과 화목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 내가 평생 꿈꿔왔던,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들을 나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칠흙같은 밤 진물범벅이 된 온몸을 긁고 또 긁으며 지쳐 쓰러져 잠들던 어린 내가 지금까지 견뎌 준 것이 너무도 고맙다.
어둡고 춥고 너무 외로웠던 길고 길었던 밤들을 지나 찬란하게 비춰오는 아침 햇살에 내가 단단히 두발로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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